성인지 예산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개선 요구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제도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조례를 놓고 씨름 중이다.
지자체 중에는 조례 제정을 통해 성인지 예산의 중점관리 사업 선정 등 제도 개선책을 마련한 곳이 있는 반면, 한 쪽에서는 조례 상 일부 단어가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반발에 부딪히는 등 곳곳에서 논란이 진행 중이다.
성인지 예산은 여성과 남성이 어느 한 쪽의 치우침 없이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평등한 예산 배분를 유도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그동안 가로수 정비나 공원·주차장 조성, 도서관 환경 개선 등 본래 취지와는 다른 엉뚱한 곳에 쓰이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성인지 예산이 배분되는 사업들의 목적부터가 구체적이지 못하고 그 대상자와 수혜자를 산출하는 근거 또한 빈약할 뿐만 아니라 성별 격차 원인을 분석하는 방법은 저마다 제각각이라는 지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행정 실무자들 가운데는 기계적으로 남녀 성비만 맞추면 된다고 생각하는 등 제도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태반이다.
<광주광역시의회>
지난 2017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이 같은 점을 개선하기 위한 조례안을 발의했던 광주시의회 전진숙 의원은 당시 “법적 근거가 있지만 여성만을 제도의 수혜자로 보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성별영향분석평가와 성인지예산제도의 연계성이 부족해 제도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조례의 필요성을 밝힌 바 있다.
이후 충북 청주시·충주시·음성군, 인천 동구, 광주 동구·서구·남구·북구·광산구 등 기초지자체 8곳이 관련 조례안을 제정했으며, 올해 들어서는 충북도, 전남도, 제주도 등 광역지자체 3곳이 조례 제정 대열에 합류했다.
지난 7월 ‘제주특별자치도 성인지 예산제 성과향상을 위한 관리 조례안’을 가결한 제주도의회는 행정자치위원회 조례안 심사보고서에서 “성인지 예산 대상사업과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 추진되는 등 양적 성과에 비해 제도 실행력과 실효성이 낮다고 판단, 재정사업의 성평등 성과를 높이고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구체적인 실행방안과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최근 경북도의회와 전북도의회는 각각 지난달 입법을 예고했던 ‘성인지 예산제 실효성 향상 조례안’ 상정을 잠정 보류, 소관 상임위에서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해당 조례안은 성인지 예산 중점관리 사업 선정을 비롯해 공무원 성인지 감수성 향상, 관련 예산·결산서 작성 등을 위한 지침서 제작과 전문가로 구성된 운영 협의체 설치를 골자로 하고 있다.
경북도는 본 예산의 11%인 9500억 원, 전북도의 경우 전체 예산 대비 약 7%를 차지하는 4940억 원이 성인지 예산으로, 여성일자리 창출과 여성 취약계층 지원, 여성 권익보호를 위한 양성평등정책추진·성별영향분석평가·자치단체 특화사업 등에 편성하고 있다.
두 의회 역시 “성인지 예산제의 실효성을 높이는 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기 위한 조례”라고 밝혔지만 각 의회에는 “당장 조례안을 폐기하라”는 민원이 쏟아졌다. 의회 홈페이지 게시판은 조례안에 반대하는 글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전북도의회 홈페이지>
<경북도의회 홈페이지>
문제가 된 부분은 조례안 내용 중 ‘성차별’, ‘성평등’이라는 단어였다. 이 용어가 동성애 등 다른 의미로 확대해석이 가능하다는 우려가 제기된 것. 일부 학부모들과 종교계에서 해당 조례가 향후 성 소수자 지원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철회를 주장하고 나섰다.
전북도의회가 입법예고했던 조례안을 보면 ‘성차별’이라는 용어가 4번, ‘성평등’이라는 용어가 11번 나온다. 광주, 제주 등 다른 지역 조례에서도 비슷한 횟수로 언급되고 있다.
한 민원인은 “성평등은 양성평등과 엄연히 다른 개념”이라며 “양성평등은 남과 여 두가지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지만 성평등은 젠더평등이고 젠더에는 수십 가지가 넘는 사회적 성이 포함되어 이는 곧 성소수자 등을 인정한다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당 조례안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양성평등과 대치되는 개념인 ‘성평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며 “‘성평등’이라는 용어는 ‘양성평등’으로, ‘성차별’이라는 용어는 ‘남녀차별’로 바꿔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주민은 “지금도 많은 청소년들이 잘못된 문화로 정체성에 혼돈을 겪고 있는데 성평등, 성차별 용어를 적용하게 되면 정체성이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경북도의회 임미애 의원>
이에 대해 경북도의회 임미애 의원은 “양성평등 기본법이라는 법 테두리 안에서 조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전북도의회 김이재 의원은 “특히 기독교 등 종교계의 반발이 심하다”며 “반대 의견대로 용어를 바꿨을 경우 또 다른 반발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조례안의 제정 취지나 사회적 이해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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